한문학자 장유승의 길에서 만난 고전 : 2012년 5월 23일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입니다. 국가에서는 새로 승려가 되거나 사찰을 짓는 것을 엄격히 규제햇습니다. 승려들은 도성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천민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산속의 사찰에 머무르는 승려들은 유람을 나온 양반들의 시중을 들고 심지어 서커스까지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조금만 잘못을 해도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조선시대 승려는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이렇게 천대받던 승려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하여 국난극복에 일조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은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승려들을 다시보는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국가에서는 군대의 편제로 조직화된 승려들을 부리기 쉽다는 이유로 성을 쌓거나 종이를 만드는 등에 각종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천대받는 것도 서러운데 중노동까지 강요받으니 승려들의 생활이 갈수록 피폐해진 것도 당연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 수도자의 본분이지만 이래서야 수행은 커녕 연명조차 어렵습니다. 결국 승려들은 먹고 살기위해 자구책을 마련했습니다.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들어 팔고, 떠돌며 구걸했습니다. 이 와중에 일부 승려들은 세속적인 가치에 집착한 나머지, 결국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고전문학에 재물을 욕심내고 여인을 농락하는 탐욕스럽고 비도덕적인 승려의 모습이 자주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승려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승려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억대 도박을 벌이는 모습이 공개되어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장소가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 이었으니 먹고살기 어려워 도박에 손을 대지는 않은 듯 합니다. 타락한 승려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승려들의 눈물과 피땀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한국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대중의 태도야 말로 큰 문제입니다. 더이상 이런 일을 당연시하지 않도록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출처 : TBS FM '열린아침 송정애 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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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자 장유승의 길에서 만난 고전 : 2012년 5월 22일

아이가 태어난지 1년이 되면 돌잔치를 합니다. 돌잔치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돌잡이 입니다. 19세기 성해응(成海應)의 《난실담총(蘭室譚叢)》이라는 글에 순조 임금의 돌잡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글에 따르면 순조 임금은 비단실을 먼저 잡고 이어서 차례로 국수와 화살을 집은 뒤 쟁반에 올린 쌀과 떡을 만졌다고 합니다.

돌잡이의 유래는 약 1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6세기경에 편찬된 《안씨가훈(顔氏家訓)》에 아이를 시험한다는 시아(試兒)라는 풍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강남 지방에서는 아이가 태어난지 1년이 지나면 새 옷을 지어 깨끗이 씻기고 차려입힌 다음 남자아이는 활/화살/종이/붓, 여자아이는 칼/자/바늘/실/음식과 함께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집는지 보아 앞날을 점친다고 하였습니다. 돌잔치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영아 사망율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 백일 내지는 돌이 될 때 까지는 외부사람과의 접촉을 가급적 삼가지만 돌을 맞이하면 위험한 시기를 넘겼다고 보고 친지들을 불러 모아 광대한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아이가 돌을 넘길 때 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 입니다. 아이에게는 좋은 음식, 비싼 장난감 보다 곁에서 돌보아 주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진 요즘에야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어느정도 자랄 때 까지는 어머니가 직접 돌볼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이를 공짜로 남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지금의 복지정책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형수라도 임신중이면 산후 백일까지는 형집행을 유예하고 아이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죄없는 아이가 짧은 기간이나마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도록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어머니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돌은 커녕 백일도 안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일터로 나가기를 강요받아야 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출처 : TBS FM '열린아침 송정애 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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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자 장유승의 길에서 만난 고전 : 2012년 5월 21일

조선 인조 때 소를 폐사에 이르게 하는 전염병인 우역(牛疫)이 창궐하여 한우의 씨가 마를 위기에 처했습니다. 소가 없으면 쇠고기는 둘째 치고, 당장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 관원들이 모여서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결국 외국에서 수입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중국은 소값이 비싸고 일본은 운송이 어려우므로 소값이 비교적 저렴한 몽고에서 육로를 통해 수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소를 수입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성익(成釴)이라는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따르면 성익(成釴)은 1638년 1월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의 심양을 경유해 몽고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들인 몽고우(牛) 181마리를 조선에 들여왔습니다. 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그 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국제무역을 통해 긴요한 물자를 조달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몽고에서 수입한 소가 번식하여 도리어 백성의 폐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 따르면 사람이 먹을 것도 부족한데 수많은 소를 먹여 살릴라니 백성의 부담이 컸다고 합니다. 소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였던 것입니다. 쇠고기도 중요하고 농사도 중요해서 소를 수입했지만 정작 소를 기우는 사람들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시대는 지났지만 소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의 안전 문제를 두고 논란이 그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부는 무역마찰을 우려하고 서민들은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자기 일을 걱정하는 가운데 우리 소를 키우고 있는 한우농가는 수입 쇠고기의 물량공세에 광우병의 여파까지 겹치는 바람에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고 여겨서인지, 이 점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출처 : TBS FM '열린아침 송정애 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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