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장유승의 길에서 만난 고전 : 2012년 6월 11일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대까지 약 200년 동안 가장 쟁점이 되었던 외교현안은 영토분쟁도 아니고 마역마찰도 아니고 바로 족보문제였습니다. 명나라의 관찬 백과사전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의 간신 이인임(李仁任)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정정을 요청했습니다. 마침내 1588년 사신들이 정정된 책을 가지고 돌아오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80년여년 뒤인 1771년 청나라의 학자 주린(朱璘)이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이라는 역사책에 이성계의 잘못된 족보가 그대로 실려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영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정정을 요청하는 한편, 국내에서 이 책을 사고판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통역관 및 서적상인 백여명이 심문을 받다가 죽을 지경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중국에서 수입되는 서적은 엄격한 검열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향한 사람들의 열망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입서적을 읽고서 넓은 세계에 눈을 뜨고,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정조는 엄격한 사상통제정책을 실시합니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입니다. 문체를 올바르게 되돌린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겉으로는 문예정책으로 보이지만, 실은 새로운 문체가 동반하는 불온한 사상을 차단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슬퍼런 감시와 통제도 시대의 흐름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금서정책은 지식사회의 구조를 겉과 속이 다른 기형적인 구조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출판사와 저자들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에 반발하여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국방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금서정책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시대를 역행하는 금서정책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점을 유념했으면 합니다.

출처 : TBS FM '열린아침 송정애 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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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fe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