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장유승의 길에서 만난 고전 : 2012년 6월 7일

친족간의 유대가 유난히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관청에 근무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상피제라고 합니다. 서로 피하는 제도라는 상피제는 사촌 이내의 친척, 또는 혼인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의 경우 같은 관청은 물론 상하관계에 있는 관청이나 소관업무가 유사한 관청에서도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제도였습니다. 인사이동으로 어쩌다가 친인척이 직무상 연관이 있는 관청에 근무하게 되면 두 사람중 관직이 낮은 사람을 다른 곳으로 전출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감찰업무를 맡은 기관은 상피제를 더욱 엄격하게 적용했고, 돈과 곡식을 관리하는 관직은 전임자의 친인척이 후임자가 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과거시험의 시험관과 응시자도 상피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조선 말기에 공직기강이 문란해진 것은 이 원칙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지금 공식적인 제도로서의 상피제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념에 상피제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은 주의를 요합니다. 고위 공무원과 하급 공무원이, 시험관과 수험생이, 사장과 직원이 친인척 관계라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됩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공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 공직자들이 제도의 헛점을 악용하여 친인척을 우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지방자치단체가 기능직 공무원으로 채용한 사람들의 절반이 간부 공무원의 친인척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지자체에서는 선발과정이 공정하여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외교부장관이 딸을 특채로 외교부에 채용한 사실이 밝혀져 물러난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론도 있지만, 비슷한 자리가 얼마든지 있는데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굳이 의심을 살만한 처신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꼭 부정을 저지를 소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불필요한 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상피제의 취지를 되살려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출처 : TBS FM '열린아침 송정애 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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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fe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