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장유승의 길에서 만난 고전 : 2012년 3월 26일

염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염》은 청렴을 지키는 태도, 《치》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인류의 염치는 나라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500년간 지탱할 수 이었던 것은 예(禮)의 염치라는 나라의 네 기둥이 튼튼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공직자는 조금이라도 혐의를 받는 일이 있으면 즉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일단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것을 피혐(避嫌)이라 합니다. 혐의를 피한다는 말입니다. 혐의를 피해 사직서를 제출하면 공직자의 기강을 담당하는 사헌부(司憲府)나 사관원(司諫院)에서 진상을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사직서를 수리할지 판단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습니다. 혐의를 받는데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지 않으면 염치없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염치없는 사람은 나라의 근본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혐의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물러나야 한다면, 당연히 억울할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이 있건 없건 혐의를 받는 사람이 공직에 있으면 그 사람만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비난을 받고 나아가 국왕에게 정치적 부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혐의가 사실이건 아니건 일단 혐의를 피해 자리에서 물러나 진상이 밝혀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 공직자들이 염치를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공직자는 이런저런 구설수에 휘말리기 쉽습니다. 권한이 클수록 혐의를 받는 일도 많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공직자의 숙명입니다. 그런데 혐의가 있으면 일단 잡아떼고, 속속 증거가 드러나면 말을 바꾸며, 입으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도 끝까지 버팁니다. 결국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 여론이 거세지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물러납니다. 염치보다 자리가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겠지만,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은 두고두고 따라다닙니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과하고 책임지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으려는 염치없는 행동입니다. 여론은 염치를 지키는 사람에게 관대한 법입니다. 

출처 : TBS FM '열린아침 송정애 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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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fe 스토리